이창동 영화에는 왜 이제야 사랑이 제목에 등장했을까 가능한 사랑 영화 해석
이 글의 질문은 아주 단순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1997년 <초록물고기>부터 2026년 <가능한 사랑>까지 7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버닝
그리고
가능한 사랑.

그런데 가만히 제목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장편영화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직접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왜 하필 지금일까요?

어쩌면 이창동 감독은 지난 30년 동안 사랑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쓰지 않았을 뿐, 계속해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온 것은 아닐까요?

1997년부터 2026년까지, 제목만 놓고 봐도 흥미롭다

먼저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장편영화 제목을 순서대로 놓아보겠습니다.

연도 작품 제목에서 떠오르는 이미지
1997 초록물고기 기억·가족·사라진 세계
2000 박하사탕 순수했던 과거·기억
2002 오아시스 메마른 현실 속 안식처
2007 밀양 장소·빛·구원
2010 아름다움·언어·윤리
2018 버닝 욕망·분노·소멸
2026 가능한 사랑 사랑·욕망·자유·타인

이렇게 나란히 놓으면 마지막 제목이 유독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전 작품들은 대부분 사물이나 장소, 상태를 가리키는 짧고 상징적인 제목입니다.

그런데 2026년 신작은 상당히 직접적입니다.

사랑.

그것도 단순히 <사랑>이 아닙니다.

<가능한 사랑>입니다.

이 한 단어가 붙으면서 제목은 선언이 아니라 질문처럼 들립니다.

사랑은 가능한가?

그런데 정말 이전 영화에는 사랑이 없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었을 뿐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계속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등장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있고, 연인의 사랑도 있으며, 다른 인간을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흔히 로맨스 영화에서 만나는 사랑과 조금 다릅니다.

이창동 영화에서 사랑은 대체로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이 시작됩니다.

사랑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가?

상처받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용서하지 못하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여러 작품에서 다른 형태로 반복됩니다.

초록물고기|사랑보다 먼저 등장한 것은 ‘가족’이었다

1997년 <초록물고기>에서 이창동 감독이 처음 바라본 관계는 가족입니다.

군 복무를 마친 막동이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가 기억하던 세계는 이미 달라져 있습니다.

도시는 변했고 가족도 흩어져 있습니다.

막동에게 가족은 돌아가고 싶은 곳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록물고기>에서 사랑은 따뜻한 감정보다는 이미 사라져버린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마음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이창동 영화에서 사랑이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박하사탕|사랑은 과거에 있었지만 인간은 돌아갈 수 없다

<박하사탕>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사랑을 생각할 때 특히 중요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한 남자의 인생을 거꾸로 되돌아갑니다.

현재의 김영호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삶이 무너져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과거로 갈수록 전혀 다른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순임이 있습니다.

박하사탕 역시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박하사탕은 단순한 간식이 아닙니다.

돌아갈 수 없는 순수했던 시절과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을 거슬러 갈수록 관객은 알게 됩니다.

사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이 점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는 것.

그래서 <박하사탕>의 비극은 한 남자의 실패를 넘어섭니다.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보여줍니다.

오아시스|사실 가장 직접적인 사랑 영화였다

2002년 <오아시스>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 가운데 가장 직접적으로 사랑을 다룬 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두와 공주는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입니다.

그런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그런데 관객은 두 사람의 관계를 편안하게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 불편함이 영화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 사랑할 자격을 결정하는가?

사회가 인정해야 사랑인가?

가족이 인정해야 사랑인가?

관객이 보기 편해야 사랑인가?

아니면 두 사람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그래서 제목도 흥미롭습니다.

‘사랑’이 아니라 <오아시스>입니다.

메마른 현실 속에서 두 사람만 잠시 도달할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어쩌면 이창동 감독에게 사랑은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평범한 감정이 아니라 가혹한 현실 속에서 어렵게 발견하는 오아시스였는지도 모릅니다.

밀양|사랑보다 더 어려운 것은 용서였다

2007년 <밀양>으로 가면 사랑의 문제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신애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종교를 통해 위로와 구원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용서의 문제와 마주하면서 다시 흔들립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남녀의 관계를 넘어섭니다.

신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용서와 구원의 문제가 겹칩니다.

특히 영화가 던지는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다른 존재가 먼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가?

사랑과 용서가 아름다운 말이라고 해서 실제 인간의 고통까지 쉽게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시>에서는 사랑이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미자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시를 쓰고 싶어 합니다.

꽃을 보고, 햇빛을 보고, 세상을 관찰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아주 불편한 현실과 마주합니다.

이때 영화는 아름다움과 윤리를 한자리에 놓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함께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영화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는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바로 옆 사람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 아름다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버닝|사랑이 사라지고 ‘욕망’만 남은 세계

그리고 2018년 <버닝>에 도착하면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종수, 해미, 벤 사이에는 관계가 있지만 그것을 전형적인 사랑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욕망, 질투, 계급 차이, 불안이 뒤섞여 있습니다.

종수는 해미에게 끌립니다.

하지만 종수가 해미를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벤 역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버닝>은 이창동 영화에서 인간관계가 가장 불확실한 작품 중 하나로 느껴집니다.

초록물고기의 가족

박하사탕의 잃어버린 사랑

오아시스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

밀양의 용서와 구원

시의 타인의 고통

버닝의 욕망과 계급

가능한 사랑

이렇게 놓으면 2026년 신작의 제목이 더욱 흥미롭게 보입니다.

그리고 8년 뒤, 제목에 처음 ‘사랑’이 들어왔다

<버닝> 이후 8년.

이창동 감독은 신작 제목에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넣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한 단어가 더 붙어 있습니다.

가능한.

이 표현은 상당히 묘합니다.

‘위대한 사랑’, ‘영원한 사랑’, ‘운명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가능한 사랑입니다.

무엇인가 가능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반대로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제목 자체가 질문처럼 느껴집니다.

이 시대에 사랑은 아직 가능한가?

더 놀라운 것은 영화의 출발점이 ‘사랑’이 아니라 노동 문제라는 점이다

<가능한 사랑>이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은 제작 배경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영화의 출발점에는 대규모 정리해고와 파업에 대한 폭력적 진압이라는 한국 사회의 노동 문제가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사건을 접한 뒤 영화로 응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 노동자들의 고통을 극영화로 만드는 것이 옳은지를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결국 2024년 공동 각본가 오정미와 함께 프로젝트를 다시 발전시켰고, 노동자들의 삶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 결과 영화에는 두 부부가 등장합니다.

인물 배우 위치
호석 설경구 해고 노동자
미옥 전도연 호석의 아내
예지 조여정 다큐멘터리 감독
상우 조인성 예지의 남편

서로 다른 두 부부가 만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차이와 숨겨진 욕망이 드러납니다.

베니스국제영화제 공식 소개 역시 이 작품을 해고 노동자 부부와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가 만나 서로 다른 삶과 욕망을 마주하는 이야기로 설명합니다.

이창동 감독이 직접 설명한 ‘사랑’의 의미

여기까지는 작품을 보면서 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이창동 감독 자신은 왜 사랑을 이야기했을까요?

베니스국제영화제가 공개한 감독의 글에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노동과 자본을 비롯한 여러 힘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 자체가 사랑의 한 형태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 삶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랑과 결국 다른 사람에게 주게 되는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설명을 보면 <가능한 사랑>에서 말하는 사랑을 단순한 연애 감정으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창동이 말하는 ‘가능한 사랑’을 이렇게 읽어볼 수 있습니다.

사랑 = 연애

가 아니라

사랑 =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
사랑 = 다른 삶을 이해하려는 것
사랑 = 자유를 향해 움직이는 욕망
사랑 = 결국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행위

30년의 제목을 다시 배열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보인다

여기서 조금 과감한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일곱 작품 제목을 하나의 문장처럼 이어보는 것입니다.

초록물고기처럼 사라져버린 세계를 기억하고,

박하사탕처럼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떠올리고,

메마른 현실에서 오아시스를 찾고,

밀양에서 구원을 찾다가 실패하고,

그래도 를 통해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욕망과 분노가 버닝하는 세계를 지나,

마침내 묻는다.

가능한 사랑?

물론 이것이 감독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연속 구조라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한 관객의 해석입니다.

하지만 약 30년에 걸친 작품을 한꺼번에 바라보는 방식으로는 꽤 흥미롭습니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단어는 어쩌면 ‘가능한’이다

저는 이번 제목에서 오히려 ‘사랑’보다 ‘가능한’이라는 단어가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이창동 감독의 과거 영화들을 생각하면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영화 속 세계는 사랑하기 좋은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역사와 사회에 상처받고, 가족에게서 멀어지고, 사회에서 배제됩니다.

용서하려다가 실패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며, 계급 때문에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갑니다.

그런 세계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단순히 ‘사랑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됩니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조심스러운 대답이 바로

‘가능한 사랑’

이라는 제목일지도 모릅니다.

이창동 영화 7편을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읽어보면

작품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초록물고기 돌아가고 싶은 가족과 사라진 세계
박하사탕 잃어버린 순수와 돌아갈 수 없는 사랑
오아시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두 사람의 관계
밀양 사랑·용서·구원의 한계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윤리
버닝 사랑과 욕망, 질투와 계급의 혼재
가능한 사랑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다가갈 가능성

그렇다면 ‘가능한 사랑’은 이창동 영화의 결론일까?

아직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국내 개봉 전이기 때문에 실제 영화의 결말과 세부적인 표현을 확인하기 전에 작품 전체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공식적으로 밝힌 제작 의도만으로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노동과 자본, 인간의 자유와 욕망을 사랑이라는 문제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가능한 사랑>은 이전 작품들과 단절된 영화라기보다 오히려 이전 영화에서 계속 제기했던 문제들을 새로운 단어로 다시 바라보는 작품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단어가 바로 ‘사랑’입니다.

영화를 볼 때 확인해보고 싶은 5가지 질문

9월 23일 <가능한 사랑>을 직접 본다면 다음 질문을 기억해두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1. 제목의 ‘사랑’은 부부 사이의 사랑만을 의미하는가?
  2. 왜 제목이 ‘사랑’이 아니라 ‘가능한 사랑’인가?
  3. 노동과 계급의 차이가 사랑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4.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행위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5. 영화가 끝났을 때 사랑은 정말 ‘가능하다’고 느껴지는가?

이 다섯 질문에 어떤 답을 얻게 되는지에 따라 영화 제목의 의미도 상당히 달라질 것입니다.

FAQ

Q. 이창동 감독 영화 중 제목에 ‘사랑’이 들어간 작품이 이전에도 있었나요?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장편영화를 기준으로 하면 <가능한 사랑>이 처음입니다. 이전 장편은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버닝>입니다.
Q. 가능한 사랑은 로맨스 영화인가요?
공식 시놉시스만 보면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해고 노동자 부부와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가 만나 서로 다른 삶과 숨겨진 욕망을 마주하는 이야기이며 노동, 계급, 자유와 인간관계가 중요한 배경입니다.
Q. 이창동 감독은 가능한 사랑의 ‘사랑’을 어떻게 설명했나요?
베니스국제영화제 공식 감독의 글에서 노동과 자본 같은 힘이 인간의 삶을 형성하더라도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그러한 욕망 자체가 사랑의 한 형태일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습니다.
Q. 가능한 사랑의 주연 배우는 누구인가요?
전도연, 설경구, 조인성, 조여정입니다. 이창동 감독과 전도연은 <밀양> 이후, 설경구는 <오아시스> 이후 다시 장편영화에서 만났습니다.

마무리|어쩌면 이창동은 이제야 제목에 ‘사랑’을 썼을 뿐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했습니다.

“왜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 처음 영화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넣었을까?”

그런데 이전 여섯 편을 다시 돌아보니 질문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정말 이전 영화에는 사랑이 없었던 것일까요?

<초록물고기>에는 돌아가고 싶은 가족이 있었고, <박하사탕>에는 잃어버린 순수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오아시스>에는 세상이 인정하지 않는 관계가 있었고, <밀양>에는 용서와 구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시>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인간의 윤리를 물었고, <버닝>에서는 사랑과 욕망, 질투와 계급이 뒤섞였습니다.

그리고 2026년.

마침내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가능한 사랑>.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이창동 감독이 갑자기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영화라기보다,

지난 30년 동안 계속 이야기해왔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본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최종적인 답은 영화가 개봉한 뒤 각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가장 이창동다운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남기는 것.

“이런 세상에서도 사랑은 가능한가?”

자료 확인 및 출처

· La Biennale di Venezia - Ga-neung-han sa-rang (Possible Love), 공식 작품 소개 및 Director's Statement
· Reuters - South Korea's Lee Chang-dong tackles labour trauma in Venice comeback, 2026.09.06

※ 작품별 ‘사랑’에 대한 해석은 공식 설정과 감독의 발언을 토대로 작성자가 영화들을 연결해 해석한 내용이며, 감독이 직접 일곱 작품을 하나의 연속된 ‘사랑’의 서사라고 밝힌 것은 아닙니다.